AI 시대, 우리는 각자의 미술관을 만들어야 한다

다시 돌아온 큐레이션, 달라진 역할

대학 시절 전공은 언론정보학이었다. 당시 수업에서 '큐레이션'이라는 개념을 처음 배웠다. 웹 2.0을 맞아 블로그와 유튜브 같은 플랫폼이 등장하고, 누구나 온라인에 UGC를 쏟아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큐레이션이 다시 중요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AI 덕분에 초창기 웹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콘텐츠가 빠르게 쏟아지고 있다. 이제 AI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을 넘어 인간이 하던 실행의 영역까지 야금야금 대신하고 있다. 만들고 실행하는 일이 쉬워질수록, 무엇을 만들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고 수많은 결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이러한 선택과 판단의 과정은 큐레이션과 맞닿아 있다. 큐레이션은 단순한 수집에 그치지 않는다. 특정한 관점과 목적에 따라 무엇을 선택하고 제외할지 정하고, 선택한 것들의 관계와 맥락을 구성해 그 의미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러한 선택이 축적되면서 그 사람만의 안목이 만들어진다.

물론 큐레이션과 안목은 원래 중요했다. AI 시대에 새롭게 달라진 것은 그 중요성 자체라기보다 큐레이션이 작동하는 범위다.

웹 2.0 시대의 큐레이션이 주로 넘쳐나는 콘텐츠 가운데 무엇을 보고 무엇을 연결할지 결정하는 일이었다면, AI 시대에는 선택의 대상이 더 넓어진다. 선별된 정보와 사례는 AI가 결과를 만들 때 참고하는 맥락과 기준이 된다. 동시에 AI가 수많은 결과를 빠르게 만들어낼수록, 어떤 문제를 다룰지와 어떤 결과를 세상에 내놓을지는 사람이 판단해야 한다. 큐레이션에 필요한 선택과 판단이 콘텐츠를 정리하는 단계를 넘어, 제작 과정 전반에서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개발자의 역량을 평가할 때 무엇을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지도 바꾸고 있다. 어떤 문제를 선택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해결했으며, 그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었는지는 원래도 중요한 평가 대상이었다. 다만 에이전틱 코딩이 확산되고 구현 자체가 쉬워질수록, 코드 작성 능력이나 완성된 결과물만으로 개발자의 역량을 온전히 판단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그만큼 문제를 선택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판단의 비중도 커진다.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문제를 얼마나 높은 해상도로 나누어 사고했는지,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가 중요해지고 있다. AI가 그럴듯한 결과물을 빠르게 만들어낼수록, 결과물만으로는 그 사람의 역량을 판단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무엇을 만들었는지만큼이나 무엇을 버렸고, 왜 그것을 남겼는지를 설명하는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AI가 더 많은 것을 만들고 실행할수록, 사람에게는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관계 지으며 무엇을 세상에 내놓을지 결정하는 큐레이터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그리고 그 선택과 판단이 여러 작업에 걸쳐 축적될 때, 그 사람만의 관점이 드러난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떠올려보자. 각각의 미술관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주제에 따라 중요한 작품을 수집한다.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맞춰 작품의 관계와 순서를 구성하고 전시를 설계한다. 이러한 선택이 오랫동안 쌓이면 사람들은 어떤 주제를 마주했을 때 자연스럽게 특정 미술관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은 단순히 작품을 수집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전시할지 반복해서 선택했다. 그렇게 축적된 선택이 결국 그 미술관의 관점이자 정체성이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앞으로 개인도 자신만의 작은 미술관을 꾸려가는 큐레이터가 되어야 할 거라 생각한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자료와 결과물을 수집하고 연결하며, 왜 그것을 선택했는지 기록하는 것이다. 이 미술관에는 완성된 결과물만 전시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을 문제라고 보았는지, 무엇을 선택하고 버렸는지, 어떤 기준으로 수정했으며 언제 완성됐다고 판단했는지까지 함께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축적된 선택은 취향을 넘어 그 사람만의 관점이 된다.

이렇게 꾸려온 나만의 미술관은 일종의 포트폴리오이기도 하다. 관점과 안목은 이력서나 자기소개만으로 쉽게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연결해 왔는지를 세상 밖으로 꾸준히 드러낼 때, 사람들은 그 축적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관계와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

앞으로 사람들은 누군가의 말이나 직함만으로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오랜 시간 무엇을 수집하고 무엇을 버렸으며,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 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각자가 만들어온 작은 미술관을 통해 서로의 관점과 안목을 발견하고 신뢰하는 시대로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