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디자인공부 | 불필요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디자인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철학자 스테판 비알이 어원부터 윤리까지 꼼꼼히 짚어낸,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디자인 고찰입니다.

2004년 GOD의 4집 앨범 타이틀 곡 《길》을 기억하시나요?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난 걸어가고 있네

<길>의 가사는 당시 방황하던 청소년들의 많은 공감을 샀습니다. 그에 힘입어 GOD는 2004년 방송3사 연말시상식을 대상으로 휩쓸었지요. 가사가 참 공감이 갑니다. 앞서 청소년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남녀노소를 불문, 노래가 전하는 감성을 공유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재와 앞날에 대한 관심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태동한 이래 현대의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인생에서 자신의 존재와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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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흔히 ‘역사에서 길을 찾는다.’는 말처럼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문제를 겪는 주체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선행됐을 때, 비로소 더 나은 방향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가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개인을 비롯해 사회 모든 분야에서 중요합니다. 하지만 특히 다른 영역 사이에서 밀접하게 연결된 ‘디자인’ 분야에서는 더욱 필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많은 유명 디자이너들이 각자의 경험과 성취를 토대로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고, 매년 전문기관에서 수 많은 디자이너를 배출합니다. 작업 프로세스나 도구의 측면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많은 디자인 연구가들은 아직까지도 막연한 디자인의 본질적 개념에 대해 더 많은 고찰과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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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시각에서 접근한 결과물이 스테판 비알의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입니다. 스테판 비알은 프랑스 님 대학교의 디자인학 교수로 철학자의 입장에서 디지털과 디자인을 연구합니다. 그래서인지 개념에 대한 접근방식이 단어의 어원과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의 의도까지 꼼꼼하게 따져나갑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이지요.

'인터랙티브 디자인'이라는 표현은 이것으로 '인터페이스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대체하고자

빌 모그리지가 사용한 의미에서만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터페이스란 무엇일까?

이 용어는 영어에서 차용되었으며, 원래 두 개체 사이에 공통의 경계로 형성된 면을 가리킨다. 106p

이와 같은 방식으로 디자인의 역사, 의미, 그리고 디자인 효과 등 각각의 주요 개념을 적절한 인용과 통찰로 차근차근 짚어나갑니다. 지루하거나 딱딱하지 않으며 오히려 흥미로웠습니다. 동시의 그 만의 디자인에 대한 증명과 고찰을 살펴볼 수 있었지요. 특히,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에 의해 사회조형적 성격을 지닌 디자인의 탄생과 거대자본 시스템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역설’에 대해 여러 번 기술하는데, 이를 토대로 디자이너의 창조방식과 미래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 또한 엿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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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을 짧게 요약해보면 디자인의 태생적 본질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고, 때문에 ‘혁신을 위한 원동력으로써의 디자인’이 아닌 ‘디자인이 원동력이 되는 혁신’을 향해야 하며 동시에 윤리와 미학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자이너들이 길을 보여줘야 할 때가 왔다.

왜냐하면 "이것은 디자인의 문제로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 시스템이 끼치는

환경적인 영향력의 80%가 구상단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1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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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브라운에 의하면, 20세기의 디자이너들은 미학과 이미지, 유행에 중심을

두고서 "사소한 것을 작업하는 검은색 터틀넥 차임의 디자이너 안경을 낀 성직자 집단"을 형성했다.

하지만 21세기의 디자이너들은 세계를 다시 고안하는 시스템의 사상가들이 되어 결국

'인간중심 디자인'이 도래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133p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마케팅과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전, 다른 책의 리뷰에서 마케팅과 디자인, 개발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 광고업계의 트렌드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스테판 비알은 이에 대해 마케팅과 디자인의 명백한 선을 그으며 디자인의 경우, 시장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한다는 윤리적 입장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디자이너에게 윤리적 태도에 대한 입장을 견지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산업을 제외할 수 없는 디자인의 숙명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인용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냐 그렇지 않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디자이너일 때 이것을 가지고 할 수 잇는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59p

책에서 디자이너가 날마다 외워야 할 좌우명으로 “그대의 행위가 지구 위에서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삶의 영속성과 일치하도록 행동하라”같은 문구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 디자이너에게 조금 과한 숭고함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역할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의식이 깃든 책 장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문구들은 디자이너의 사명감과 자신의 일에 대한 가치를 뒤돌아보게 했습니다.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의 서문에는 ‘이 책은 디자인에 대한 짧은 고찰이다.’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책은 짧은 서문만큼이나 간결하고 가볍지요. 하지만 내용은 디자인과 디자인이 아닌 것에 대한 기준을 잡고, 디자인의 본질에 대해 고찰할 수 있을 만큼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과연 디자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 일까요? 그 윤곽을 그려보고 싶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추천합니다.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